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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스토리

히말라야 14좌 완등 : 두남자의 이야기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의 고봉 14개를 모두 오른 사람을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라고 합니다.

히말라야 14좌 최초 완등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히말라야 14좌가 무엇인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산악인들이라면 다 아시는 내용이지요.

히말라야 14좌에 대해 말하면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의 산악인 라인홀트 매스너와 전설적인 폴단드의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 입니다. (지금부터는 그냥 기억나는 대로 쓰는 것이나 약간의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알피니즘이 시작된 알프스에서도 그러했지만 18세기 이후 히말라야의 고봉으로 시선을 돌린 유럽의 산악인들과 유럽의 강국들은 8000미터급 고봉들의 초등에 엄청난 노력을 쏟게 됩니다. 그야말로 국가의 자존심을 건 프로젝트였습니다. 특히 에베레스트는 영국에 의해, 낭가파르밧은 독일에 의해 끝없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는 당시 열강들의 역학관계도 영향이 있습니다. 1950년 6월 3일 프랑스의 에르조그 원정대(모리스 에르조그, 루이 라쇼날)에 의해 안나푸르나가 8000미터급 봉오리중 첫 번째로 정상을 허락하고, 아시다시피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1953년 5월 29일 힐러리경과 셰르파인 텐징 노르게이에 의해 정상을 허락하게 됩니다. 세계 최고봉 초등의 영광을 영국(힐러리경은 영국령 뉴질랜드 사람)과 힐러리 경이 차지하게 된 것이죠. 세계 최고봉 답게 에베레스트는 초등과 관련된 미스테리와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요건 다음에.....

1964년 5월 2일 중국에 의해 시샤팡마가 초등되기까지 히말라야 14좌는 초등 경쟁의 시대였습니다. 히말라야 초등의 시대가 끝나고 히말라야는 등로주의(정상 등정보다는 등정 과정을 중요시하는)에 입각한 다양한 등반이 시도 됩니다.

수 많은 산악인들이 역사적인 등정을 이루어 냈지만 그중 가장 돋보인 산악인이 바로 라인홀트 매스너 입니다.

끝없이 낭가파르밧의 정상을 노리던 독일팀은 1953년 7월 독일등반대의 일원이었던 헤르만 불이 정상을 등정했지만 등정과정에서의 여러가지 문제(헤르만 불이 정확히 독일인은 아님, 오스트리아 인,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민족 개념에서 범 독일 민족이라고 하여 참가시킨듯, 라인홀트 메스너도 마찬가지임)로 좀 더 독일스러운 사람이 정상에 등정하길 바랬던지 다시 낭가파르밧에 도전하고 이때 대원으로 참가한 사람이 바로 라인홀트 매스너와 동생 귄터 매스너 입니다.

낭가파르밧이 라인홀트 매스너의 히말라야 데뷔 무대였고, 최고의 산악 영웅의 히말라야 등반의 시작이었던 만큼이나 이 등반자체의 스토리 또한 대단합니다. 요것도 나중에 시간내서 한번 다뤄 보죠.. 영화도 있습니다.

암튼 이 등반에서 라인홀트 메스너는 정상에 서지만 하산중에 동생인 귄터 메스너를 눈사태로 잃고 맙니다. 자신도 간신히 살아 돌아오게 되죠.

엄청난 등반능력으로 히말라야에서 독보적인 클라이머였던 그에게 라인홀트메스너에 못지 않은 경쟁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폴란드의 전설적인 산악인 "예지 쿠쿠츠가" 입니다.

라인홀트 매스너가 1970년 낭가파르밧 정상에 서고 마나슬루, 가셔브롬 , 다울라기리,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순차적으로 오르고 k2를 등정할 무렵인 1979년 예지 쿠쿠츠가는 로체(8511미터)를 무산소로 등정하며 세계 산악계에 그 이름을 올립니다.

그럼

 

예지 쿠쿠츠카(좌), 라인홀트 메스너(우)

여기서 두 사람의 등정 기록을 한 번 비교해 볼까요???

라인홀트메스너 등정기록

예지쿠쿠츠카 등정기록

no

mm

peak

no

mm

peak

등정 내용

1

1970

낭가파르밧

2

1972

마나슬루

3

1975

가셔브롬1봉

4

1977

다울라기리

재등

1978

낭가파르밧

5

1978

에베레스트

6

1979

K2

1

1979

로체

노말루트

재등

1980

에베레스트

2

1980

에베레스트

루트초등최종구간무산소

7

1981

시샤팡마

3

1981

마칼루

솔로,알파인스타일루트초등

8

1982.05

캉첸중가

4

1982

브로드피크

노말루트,K2에서순화

9

1982.07

가셔브롬2봉

5

1983

가셔브룸 2

루트초등

10

1982.08

브로드피크

6

1983

가셔브롬1

알파인스타일

11

1983

초오유

재등

1984

브로드피크

루트초등,알파인스타일

재등

1984

가셔브롬2봉

7

1985

다울라기리

동계제2등

재등

1984

가셔브롬1봉

8

1985

초오유

루트초등,동계초등

재등

1985

다울라기리

9

1985

낭가파르밧

루트초등,6개월간3개봉등정

12

1985

안나푸르나

10

1986

칸첸중가

동계초등

13

1986

마칼루

11

1986

K2

루트초등세미알파인스타일

14

1986

로체

12

1986

마나슬루

알파인스타일,동계초등

13

1987

안나푸르나

14

1987

시샤팡마

루트초등,알파인스타일

재등

1988

안나푸르나

남벽동단버트레스에서동릉으로동봉등정

시도

1989

로체

남벽루트초등시도중8,350m에서추락사

위의 등반 기록처럼 두 사람은 히말라야 14좌를 오르기 시작한 시기는 달랐습니다. 라인홀트 매스너가 무려 9년 일찍 시작했습니다. 예지 쿠쿠츠카가 엄청난 속도로 따라 붙긴 했지만 라인홀트 매스너를 따라 잡기엔 역부족이었죠..

그런데 등반 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14좌 최초 완등은 히말라야 등반사중 매우 중요한 타이틀이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의 가중치는 다름.) 두사람은 최초 완등이라는 명예를 위해 경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들의 등반을 14좌 등정레이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 달리기 경주처럼 상대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게임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들의 등반은 각자의 목표를 위해 그저 노력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라인홀트 매스너는 같은 봉우리를 다섯번을 올랐습니다. 예지 쿠쿠츠카 역시 6개월 동안 세개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등반 스타일은 시종 일관 도전적인 등반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등반은 무산소 등반, 동계등반, 신루트 등반등이 주를 이룹니다. 예지 쿠쿠츠카의 이런 도전적인 등반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등반 내용들입니다. 그의 등반이 얼마나 상식을 깨는 등반이었으면 그의 별명이 유레카 였을까요..

14개의 8000미터 급 봉우리중 10개는 신루트로 등정했고, 4개봉은 동계 등정으로 정상을 올랐습니다

산악인들이 예지쿠쿠츠카를 위대한 산악인으로 기억하는 이유도 그의 등반 스타일을 혁신적이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의 등정 레이스는 세계산악계의 이슈였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등반 스타일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말 존경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라인홀트 매스너가 결국 1986년 로체를 마지막으로 14좌 완등의 종지부를 찍었고 예지 쿠쿠츠카는 1987년 시샤팡마에서 14좌 완등을 이루어 냅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아무도 오르지 못한 ..그리고 아직도 누구에게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로체남벽을 도전하다 8000미터 인근에서 추락함으로써 인생을 바친 히말라야에 잠들게 됩니다.

쿰부지역 추쿵 있는 예지쿠쿠츠카를 기리는 메모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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