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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상식/일반등산

Alpinism-ep1.

히말라야 이야기에서 알피니즘이 빠질수 없고 알피니즘에서 히말라야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알피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면서 써보겠지만 혹시라도 사실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개인적인 주관이 섞인 내용도 상당 수 있으니 감안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등산백과사전(Encyclopedia of Mountaineering)에서 알피니즘을 "mountain climbing in the Alps or other high mountains"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등산백과사전에 서 알피니즘을 별도로 정의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알피니즘은 등산의 범주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볼수 있으며 등산의 형태중 알프스와 같은 높은 고산을 등반하는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Mountaineering"은 산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활동, 등반, 트레킹, 하이킹, 스키, 캠핑 등의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본다면, 고산에서 행하는 등반형태를 알피니즘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알피니즘"은 단순한 정의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알피니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등반의 역사와 함께 의미가 달라져 왔으며 또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알피니즘(Alpinism)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부분의 문화권에서 높은 "산"은 신성시 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산에는 산신령이 있고 그리스신화의 신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산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알프스의 산들도 마찬가지로 신성시되어왔습니다. 산정상에는 신들이 살고 눈사태 같은 자연재해는 신이 노해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종교이 대상이었던 높은 산들이 정복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유럽이라고 알려져 있는것이 정설인듯합니다.

행위 자체의 관점에서 단순히 산을 올라가는 행위는 이전에도 존재해 왔습니다. 사냥꾼은 짐승을 사냥하기위해 산을 올랐고 우리나라의 심마니들은 약초를 캐기위해서 산을 올랐고, 그 유명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은 이베리아반도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나라의 장수였던 고선지 장군도 파미르 고원을 넘은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18세기 이전의 산을 오르는 행위들과 18세기 이후 알프스에서 행해진 등반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18세기 이후의  알피니즘으로 정의되는 등반은 기존의  산을 오르는 것과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입니다. 기존의 산을 오르는 행위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습니다. 즉, 사냥을 위해서, 약초를 캐기 위해서, 또는 전쟁을 위해서 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알피니즘은 이러한 수단으로써의 행위가 아닌 등산 자체가 목적인  "산을 오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알피니즘은18세기 유럽 Alps에서 시작된 등산 운동입니다. 만약 이러한 운동이 히말라야에서 시작되었다면 히말라야이즘, 안데스에서 시작되었다면 안데시즘이라고 불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산을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인 알피니즘의 기원은 1786년 발마와 파가르가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을 초등했을 무렵이라고 알려진 것이 정설입니다.

 알프스 산맥은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걸쳐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4807미터의 몽블랑이지만 몽블랑이 가장 높은 봉우리로 알려지기 전까지 각국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은 등반이 시도되었고 등정자가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몽블랑은 사람이 올라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이 높은 봉우리는 항상 하얀 눈으로 덥혀 있었고, 정상은 하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폭풍이 몰아치는 곳입니다. 거대한 눈사태는 마을까지 밀어닥쳐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유럽인들이 알고 있는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올라야 할 대상으로 바뀐것은 소쉬르(Horace-Bénédict de Sausure)의 현상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760년 스위스 제네바의 저명 인사이자 대학교수였던 소쉬르에 의해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초등에 현상금이 붙었고  그 현상금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Jacques Balmat 와 같은 젊은 수정채취꾼들을 충동질 했습니다. 몇 차례의 시도와 실패끝에 1786년 8월 8일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정상에 선 사람은 Jacques Balmat 와 Michel-Gabriel Paccard 였습니다. Paccard는 샤모니 출신의 의사이자 아마추어 자연과학자로 알려진 사람으로 현상금보다는 몽블랑 정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컷던 인물입니다. 정상에서 기압계를 이용해 산의 높이를 측정한 것과 현상금을 모두 Balmat에게 양보한 것을 보아도 그것은 명확한 듯합니다. 

 

당시 최고봉으로 알려진 몽블랑의 등정은 엄청난 이슈였습니다. Balmat는 한 순간에 최고의 유명세를 얻었고 부와 명예를 거머 쥐었습니다. Balmat는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중에 한 사람이 되었고 Sausure 역시 최고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Sausure역시 Balmat의 안내와 가이드들의 도움을 받아 몽블랑 정상에 올랐고 높이를 측정하는 등 과학적인 업적도 이루었습니다. 몽블랑 정상 등정으로 두려움의 대상이며 신들의 영역이었던 대자연은 인간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몽블랑 초등으로 인한 인간의 자신감과 부수적으로 따라붙은  부와 명예는 몽블랑을 제외한 다른 봉우리들을 초등하는 데 불을 지르는 결과를 낳았고 몽블랑이외의 고봉들은 하나씩 등정자가 나오게 됩니다. 알프스의 각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각 국가와 지역의 등반가에 의해 등정되었으며, 1858년 아이거, 1865년 마터호른,  그랑조라스는 1865년 윔퍼봉이 1868년에는  워커봉이 등정되며 알프스의 고봉 초등식대가 막을 내립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을 등정하는 이른바 등정주의(이런 표현은 훗날 붙여짐)시대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시작부터 부와 명예를 위한 행위였던 피크헌팅(정상 사냥)으로써의 Alpinism은 이후 많은 선구적인 산악인들에 의해 철학적으로 재정비 되었습니다. 정상등정의 댓가로 제시되었던 상금과 부수적인 명예를 위한 등반은 두 명의 정상 등정자인 Balmat와 Paccard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몽블랑 초등 100주년이 되던 해인 1886년 몽블랑 샤모니의 광장에 세워진 두 명의 동상에 Paccard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Balmat와 Sausure가 주인공이 된 이유는 Alpinism의 시작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샤모니 광장의 Balmat와 Sausure의 동상, Balmat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이 몽블랑 정상이다.(제공: 변재수)

산악역사 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부와 명예는 도전을 위한 자극과 동기를 제공하지만 결국 그 부와 명예를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은 가끔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Balmat의 적극적인 계획이나 고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Parccard는 오랫동안 정상 등정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과정에는  Marc-Theodore Bourrit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밝혀진 일이지만 몽블랑 초등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심지어 정상에 더 먼저 올라간 사람은 Paccard라고 합니다. 그러나 Bourrit 초등정과 관련된 부수적인 이익창출을 위해 의도적으로 Paccard의 등정을 부인하고 Balmat는 그것을 방치하고 묵인하게 됩니다. 정상등정후 약속된 상금을 받기위해 제네바로 간 Balmat는 여기저기서 주는 축하주를 마시고 정상은 자신이 홀로 올랐고 Paccard는 중도에 포기했다고 얘기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결국 다음해인 1787년 Balmat와 Sausure는 몽블랑 정상에 올라 많은 과학적 성취와 함께 돌아오고 그의 업적키우기가 결국 Paccard를  정상등정의 영광에서 소외시켰다는 것은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Paccard의 등정은 계속 논란이 되어왔으나 그의 등정은 "삼총사"로 유명한 Alexandre Dumas가 Balmat를 인터뷰한 기록을 발표한 1832년에야 널리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Paccard가 사망한지 5년 후의 일입니다.

몽블랑이 초등정된지 200년이 지난 1986년 Balmat와 Sausure동상에서 140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Paccard의 동상이 세워 짐으로써 그의 영혼이나마 위로 받게 됩니다. 이런 사연으로 정상을 홀로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초연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