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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상식

조선시대 설악산 등산 코스

글 :  민병준

 


 

 

대한민국 성인치고 등산화 한 켤레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등산화를 갖추고서 설악산 산행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설악산은 우리 국민이 ‘최애(最愛)’하는 산이다.

 

우리는 산행을 계획한다면 가장 먼저 대상 산과 코스를 정한다. 그래야 거기에 맞춰 장비 등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 산이 설악산이라면 코스는?

 

요즘의 설악산 주요 등산 코스는 외설악은 천불동과 마등령이고, 내설악은 백담계곡, 십이선녀탕 등이다. 양양의 오색 코스, 한계령도 짧은 시간에 대청에 오를 수 있어 자주 찾는다. 그렇다면 장비도 열악하고, 산행 식량도 마땅치 않았던 조선 시대 설악산의 주요 코스는 어디였을까?

 

 

 

 

조선 시대엔 코스가 없었던 천불동계곡

 

선조들의 산행기인 유산기를 살펴보면, 조선 시대 설악산 주요 코스는 대략 4~5개 정도로 집약된다. 외설악은 저항령과 마등령, 내설악은 백담계곡과 대승령이 대표 코스였다.

 

지금 사랑받는 천불동계곡은 비선대 위쪽으로는 코스 자체가 없었다. 수 천 수 만 개의 창을 세워 놓은 듯한 암봉들이 솟아 있는데다 폭포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불동은 조선 시대엔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야 현대적인 전문 장비를 갖추고 전문등반 기술을 익힌 산악인들에 의해 처음 개척됐다.

 

 

 

조선 시대 설악산 베이스캠프는?

 

조선 시대 설악산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였을까. 조선 시대 산속의 사찰은 지금의 산장이나 대피소 역할을 하는 베이스캠프였다. 외설악의 신흥사, 내설악의 백담사가 대표적이다. 대청봉 정상 가까운 곳에 자리한 봉정암은 외설악과 내설악 코스를 연결하는 대피소이면서 대청으로 향하는 마지막 전진캠프였다. 즉 봉정암은 지금의 중청대피소 역할을 한 것이다.

 

 

신흥사 입구의 통일대불. 신흥사는 조선 시대 외설악 산행의 베이스캠프였다.

 

 

 

조선 시대 외설악에선 어떻게 접근했을까. 유람객들은 고성이나 양양에서 들어와 설악동의 신흥사에서 하룻밤 묵었고, 다음날 저항령 코스나 마등령 코스로 내설악의 백담사로 넘어갔다. 이 코스는 길이 비교적 괜찮았던 듯하다.

 

 설악산 백담사. 조선 시대 내설악 산행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내설악은 인제~용대리~백담사, 인제~한계리~대승폭포~흑선동~백담사 코스가 대표적이다. 일단 이렇게 백담사에 도착한 다음 외설악으로 넘어갔다. 백담사까지는 지금과 같다. 이후 유람객들은 백담사에서 시작해 수렴동~봉정암, 길골~저항령~신흥사, 곰골~마등령~신흥사, 오세암~마등령~신흥사로 갔다. 길골, 곰골, 저항령 등은 지금은 출입금지구역이라 지명이 낯선 이들도 있으리라.

 

구곡담~봉정암 구간에서 많이 헤맨 선비들

 

코스의 길 상태는 어땠을까. 대체로 당시로써는 산행엔 큰 무리가 없을 정도였으나, 인적이 아주 적었던 구곡담~봉정암 구간은 길이 명확지 않았던 듯하다. 산행에 나선 선비들은 이 코스에서 중간중간 묶여 있는 밧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길을 잃고 헤맸다는 내용이 이따금 보인다. 봉정암 스님들이 쌓아둔 작은 돌탑들이 이정표 역할을 했으나 쉽지 않은 코스였던 것이다.

 

 마등령 오름길에 바라본 천불동계곡. 조선 시대엔 비선대까지만 코스가 있었고, 그 위쪽으론 접근이 불가능했다.

 

조선 시대 한계령 코스는 어땠을까. 지금 한계령은 설악산 주릉을 따라 대청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잘 뚫려 있으나 조선 시대엔 코스가 아니었다. 한계령은 양양에서 접근하는 유산객들이 주로 이용했다. 이들은 한계령을 넘어 한계천을 따라 인제 쪽으로 내려오다 대승령 초입(지금의 장수대)의 한계사지 부근을 베이스캠프 삼아 대승령을 넘었다. 즉 한계령 쪽에선 한계령~한계사지~대승폭포~대승령~흑선동~백담사 코스가 메인 코스였다.

 

 

 

강원도 관찰사, 양양 부사, 인제 현감 등이 주로 유람

 

조선 시대 설악산을 찾은 이들은 주로 어떤 사람일까. 이들은 대부분 강원도 관찰사, 양양 부사, 인제 현감 등이거나 이들과 인연 있는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유산기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설악산 유산기는 영시암에 은거하던 삼연 김창흡(1653년~1722년)이 썼다.

 

 

 

설악산 봉정암 늦가을 풍경. 조선 시대에 구곡담이나 가야동에서 봉정암으로 접근하는 코스가 있었지만, 길이 워낙 험해 길을 잃기 일쑤였다.

 

1705년 용대리에서 시작해 백담계곡~수렴동계곡~오세암~마등령~비선대~신흥사 코스를 유람하고 남긴 <설악일기(雪岳日記)>는 설악산 산행의 대표적 코스 기록으로서 이후 유람객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1711년 영시암~가야동~천왕문~봉정암~구곡담~영시암 회귀 코스를 담은 <유봉정기(遊鳳頂記)>도 그렇다.

 

 

설악이여, 어떠하신지요

 

 

김창흡은 설악을 오가며 수많은 설악 시문(詩文)을 남겼다. 그 중 <설악을 바라보며(望雪岳)>의 앞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산을 향해 공손히 절하며 “어떠하신지요” 물으니

둥근 정수리 덮인 구름 느릿느릿 퍼지네

 

-삼연 김창흡의 <설악을 바라보며(望雪岳)> 중에서

 

 

 

설악을 흠모하던 삼연 선생의 마음이 잘 드러난 시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도 사랑하는 설악을 바라보며 여쭤보자. “설악이여, 오늘은 어떠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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